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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군인 채명신 장군

  • 입력 2013.11.28 18:57
  • 기자명 홍성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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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65년 주월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에 임명돼 맹호부대 장병들과 함께 열대지방인 월남전에서 1969년까지 4년 가까이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맹호사단장을 거쳐 한국군을 지휘했던 초대 주 월남 한국군 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예비역 중장이 지난 25일 향년 87세의 일기로 노환으로 별세하여 28일 영결식과 안장식이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렸다.
평소 채 사령관은 내가 죽으면 '병사들과 같이 있게 병사묘역에 묻히게 해 달라.'고 유언한 고(故) 채명신 초대 주 월남 국군사령관의 영결식이 육군장(陸軍葬)으로 치러졌으며 고인의 유언대로 가족과 의논을 거쳐 병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국방부는 채 장군의 경우 장군 묘역에 묻히는 게 원칙이나, 고인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병사묘역에 안장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장군이 자기 신분을 낮춰 병사 묘역에 안장되길 희망한 것은 현충원 설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그의 삶은 국가를 위해 헌신한 참군인의 길이었다. 살아있는 권력에도 거리낌 없이 직언을 했던 소신 있는 군인정신을 가졌던 장군이다. 필자도 맹호부대로 근무하다 전역 일주일을 남겨두고 파월을 위한 장가복무를 지원하여 월남 맹호사령부에서 2년 가까이 근무하며 채명신 사령관과 근무를 하였다. 지금은 고엽제 환자로 투병하고 있을 뿐이다. 당시 사선(死線)을 넘으면서도 자유 의지를 꺾지 않았던 채 장군의 영전에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故) 채명신 장군은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나 교사로 일하던 고인은 지난 1946년 북한군 사관학교 격인 ‘평양학원’ 개교식에서 김일성을 만났다고 평소 말씀하시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과는 다른 공산주의 사회의 현실을 목도한 고인은 같이 일해보자는 김일성의 권유를 뿌리치고 1947년 월남해 6·25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군인(軍人) 채명신 장군의 인생 최고의 순간은 1965년 8월부터 3년 8개월간의 주월 한국군사령관 시절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베트남전쟁을 ‘명분 없는 전쟁’이라며 반대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명령하자 국가의 소명(召命)으로 받아들이고 맹호사단 병사들을 이끌고 월남전에 참전하여 둑코 전투와 짜빈동 전투는 1개 중대 병력으로 6배나 많은 월맹군을 괴멸시킨 전사(戰史)에 남을 대첩이다. 당시 월남에서 미군들은 그를 군신(軍神)으로 존경했다. 애초에 한국군의 독자적인 작전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던 미군도 채 사령관의 능력을 믿고 작전권을 넘겨주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의 5·16군사정변에 가담해 혁명 5인위원회와 국가재건최고회의에도 참여했지만 군인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신개헌에 나선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장기 집권은 각하를 죽이는 길이라며. 스스로 정권을 연장하겠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고언을 여러 차례 하기도 했다. 월남전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는 “나에겐 철모가 필요치 않다”며 평생 천으로 만든 군모를 고집하기도 했다. 채명신 장군은 육군 5사단장과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이후 육군 2군사령관을 거쳐 그 후 괘씸죄에 몰린 고인은 결국 꿈에 그리던 4성 장군 진급이 좌절된 뒤 1972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군 복무기간 전투에서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태극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3회), 화랑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2회) 등의 훈장들은 채 장군의 용맹한 삶을 증명해 주지만 이제는 고인으로서 하늘에서 국가의 미래를 염려하리라 믿는다. 평생을 공산정권과 싸워온 고인은 생의 마지막까지도 투철한 안보관과 국가의식을 강조하며 종북 세력의 준동을 경계했다. 용장(勇將) 채명신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애국심과 군인정신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홍성봉의 是是非非> 홍성봉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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