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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을 심판한 법원은 왜 사회를 이 지경으로 만드나?

홍성봉의 是是非非>

  • 입력 2018.08.21 15:30
  • 기자명 홍성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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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을 법원이 무죄로 판정한 그날은 코소보, 예멘, 우간다, IS 성폭력 생존자들이 기림일을 맞아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가 개최한 국제심포지엄에 참가해 각자의 경험을 증언하고 손잡던 날이었다. 생존자들이 나서서 조직적 성폭력의 의미를, 현실을, 그 참혹한 결과를 알리고 저항하며 세상을 바꾸자고 결의하던 날이었다. 한국의 강인한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분들은 저희의 영웅들 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견디기 힘들고, 가슴이 찢어질 듯하고, 끔찍하고, 고문과 같고, 위안이 되기 어려운 아픔과 함께 살아야 하는 절망의 깊이 속에서도 여러분들은 저희에게 영감이 됩니다 라고 말하며 연대를 다지던 그날, 증거를 인멸하고, 피해자들에게 입증을 요구하고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발뺌하고 피해자의 행실과 자격을 묻고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심지어 없었던 일, 꾸며낸 일, ‘거짓말쟁이’ ‘더러운 ○○’라며 온갖 욕설과 수치심을 안겨 준 가해자들, 그리고 그 옹호자들과 힘겹게 싸워온 지난 세월을 서로 나누던 그날,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김복동 할머니께서 여성들의 광복과 명예회복의 의미를 다시 확인시키던, 바로 그날이었다. 당신들은 피해자를 피의자로 완벽히 둔갑시킨 판결문으로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위력의 존재와 위력의 행사를 구분하며, 피해자의 행실을 의심하고 증언의 신빙성을 따지는 최악의 2차 가해로 전 세계 용감한 생존자들을 경악하게 했다는 것이다.
안희정 사건 판결에 여성들이 항의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혐의 내용을 구성하는 첫 번째 사건 다음날 아침에 원고가 “러시아에서 피고인이 좋아하는 순두부를 하는 식당을 찾으려 애쓴” 것을 재판부는 두 사람 사이 위력의 작용이 없었다는 근거로 인용했다. 상사를 향한 여성 부하직원의 이타적 연애감정을 전제하고, 합의된 성관계 후 남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꺼이 찾아내서 먹인 행위로 본 듯하다. 이 남성중심적 상상의 관점은 도지사의 심기와 호불호를 살펴 순두부를 찾는 업무를 수행하는 비서가 애당초 도지사와의 성관계에 합의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동등한 입장에 있었는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다음날 남자에게 아침을 차려 주었다거나 일상적인 메시지를 보냈다고 증언한다. 우리는 왜 러시아에서까지 안희정이 아침에 꼭 순두부를 먹어야 했는지, 좋아하는 음식을 출장지에서 찾아내는 일을 비서에게 시키는 게 고위공무원으로서 당연한 일인지 여기서 묻지 않겠다. 수많은 비서와 부하직원들이 상사를 위해 이런 부류의 업무를 ‘자발적으로’ 해야 하는 사회가 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안희정의 아들은 아버지의 불륜을 챙피해야 할 것이나 그는 아버지의 무죄 판결이 자랑스럽다는 식으로 글을 올려 여성들의 가슴에 못을 박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아들의 모습에 여성들의 단체가 울분을 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거리에 나선 것이다. 물론 단순히 안희정씨 사건의 재판관들에게 항의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런데 김지은이 철저한 심문의 대상이 된 반면, 안희정의 언행은 판결문에 명시돼 있지 않다. 다만 안희정이 “맥주를 든 피해자를 포옹한 것”과 “ ‘외롭다, 안아 달라’고 말한 것”을 재판부는 “위력의 행사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이 부적절한 접근을 위력의 행사로 볼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명시하지 않는다. 그 외엔 안희정에 대한 언급이 없다. 낱말 하나로 한밤중에 담배며 술을 방으로 가져오라는 지시도,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의 주장은 잘못”이라던 처음 진술을 그가 번복했다는 사실도 논하지 않는다. 재판부는 안희정이 미투를 언급하면서 부적절한 상황에 대한 인식을 드러냈던 것에 대해서는 해석하지 않으면서, 김지은이 미투에 대한 인식이 있었지만 오피스텔을 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적극적 저항 의지 부재로 해석한다.
결국 안희정의 범죄 여부는 안희정이 아닌 김지은의 언행에 대한 판단에 의거해서 결정됐다. 이 판결이 수많은 안희정들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이기에 두렵고 염려스럽다.
광복 73주년, 세계인권선언 70주년, 촛불혁명 2주년 이후에도 여성들에게 해방과 정의는 오지 않고 있다. 여성들에게 국가는 없는 것일까·무엇이 과격하고 위험한지. 공정한 판단, 공정한 수사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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