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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폭력의 그늘

  • 입력 2013.11.21 19:28
  • 기자명 홍성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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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원 씨는 지난 1996년 여수대 해양생산학과 1학년을 마치고 의경에 자원입대했다.  입대 5개월 만인 그해 6월 14일 김 일경은 조선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조선대 총학생회와 북한 김형직 사범대 자매결연 식' 현장에 동료 전·의경 1800여명과 함께 투입됐다.
시위 학생들에 밀려 정문 방향으로 쫓기던 그의 왼쪽 발목에 화염병이 날아들어 불길이 일었다. 놀라 고개를 숙이는 그의 뒷머리를 누군가 쇠파이프로 내려쳤다. 시위 학생들은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널브러진 김 일경을 질질 끌고 가 마구 때렸다고 한다. 경찰은 김 일경을 쓰러뜨린 범인을 붙잡지 못했다. 그 후 김 의경은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이송되어 뇌사 판정을 받고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어렵사리 생명을 유지하던 그가 15일 새벽 패혈증이 악화되어 병상에 누운 지 17년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김 씨의 부친은 영정을 어루만지며 “17년 동안 곁에 있어줘 고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영정 속의 김 씨는 경찰복을 입은 늠름한 20세 청년이었다. 식물인간으로 반생(半生)을 보냈던 그는 경찰의 날인 지난달 21일 명예 순경으로 임용됐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꽃다운 나이 스무 살 청년이 의식 불명인 채로 장년(壯年)이 돼 끝내 세상을 떠났으니 말이다. 그의 영정 앞엔 올 4월 정부가 뒤늦게 수여한 옥조근정훈장이 놓였다. 그러나 아들이 한 번만이라도 눈을 떠주길 기다리며 긴 세월 하루도 빠짐없이 머리맡을 지켜 온 부모에게 무슨 위로가 됐을지 의문이다.
김 일경은 조선대병원과 서울대병원에서 아홉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한 번도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화염병에 맞은 왼쪽 발목은 화상이 너무 깊어 엉덩이 살을 떼어다 이식해야 했고. 김 의경의 어머니는 평일에, 대학 교직원이었던 아버지는 토·일요일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여수 집과 광주보훈병원을 오가며 교대로 병상을 지켰다.
아버지는 아들 영결식장에서 "불행은 내 아들에서 끝나야 한다."고 흐느끼며 말했다. 그러나 불법과 폭력 시위는 2010년 33건, 2011년 45건, 2012년 51건, 올 상반기 23건으로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지난 7월 20·21일 '울산 현대 차 희망버스' 시위 때엔 죽봉(竹棒)과 쇠파이프가 다시 등장해 시위대와 현대 차 직원 110명이 다쳤다고 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제2, 제3의 김 의경이 나오지 않는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나라가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빈소를 찾은 이성한 경찰청장은 “이런 불행한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 사회의 법질서 확립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권민주 정부가 들어선 지 20년 넘게 경과한 지금, 폭력적인 시위는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국민들의 바램 이다.
그런데도 최근 통합진보당이 벌였던 시위에서 돌로 경찰의 머리를 내리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5년 전 미국 산 쇠고기를 반대하는 집회 때에는 경찰관 464명이 중경상을 입고 경찰 차량 170여 대가 파손되는 등 우리사회는 변하지 않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42년간 순직한 전경은 322명에 이른다고 한다. 지난 2008년부터 올해 8월까지 공무를 수행하다가 다친 의경도 무려 249명에 이른다고 한다.
경찰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공무집행을 방해하는 행위는 엄하게 다스려 이제는 폭력 시위는 없어야 할 것이다. 공권력이 무너지면 국민은 사적 폭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게 된다.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위해 국민이 공권력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우리 국민들은 김 인원 순경의 명복을 빈다. 
홍성봉의 是是非非> 홍성봉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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